베트남의 역사는 한국과 너무도 닮아있다. 그래서 그런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역사의 질곡이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난 일주일 동안 베트남 근대사에 푹 빠져 있다가 이제서야 수습하고 나온다. 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료를 다 뒤져가며, 정리한 내용들이다. 원래 베트남 전쟁까지 한편으로 묶었는데, 주요한 사건들을 모조리 다루다 보니 내용이 너무 방대해져서 2편으로 나누게 됐다.
베트남 근대사 총정리
① 응우옌 왕조 (1802~1945)
1802년부터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1945년까지 베트남 지역은 응우옌 왕조(Nhà Nguyễn)가 다스리고 있었다. 당시 급변하는 정치상황에 따라 국가명이 대월국, 대월남국, 대남국으로 변했으며, 외세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주도권을 잃기도 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론 응우옌 왕조가 계속 다스렸다. 그렇다 보니, 당시에는 국기보다 왕실기가 훨씬 중요하게 활용됐다고도 한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발표된 통계자료에 따르면, 베트남 전체 인구 중 38.4%가 응우옌 성씨를 가지고 있다. 왕실 사람들이 전체 인구 중에서 이만큼이나 차지할리 없기 때문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응우옌 성씨를 획득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응우옌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왕실의 일원으로 간주돼서 각종 세금과 군대로 징집되는 것을 면제받았다. 물론 응우옌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자, 이런 혜택들은 없어졌다고 한다.
② 코친차이나 (1862~1949)
응우옌 왕조가 가장 강성했을 때는 베트남은 물론 캄보디아와 라오스 지역까지 지배한 동남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1858년 프랑스가 베트남 내 자국의 선교사들이 박해당했다는 이유로 침략을 본격화했으며, 응우옌 왕조로부터 강제로 빼앗은 베트남 남부지역에 코친차이나(Cochinchine) 공화국을 세웠다. 코친차이나는 공식적으로 1862년부터 1949년까지 존재했으며, 종국에는 월남(越南)으로 널리 알려진 남베트남의 전신이 됐다.
이후 프랑스는 1883년에 응우옌 왕조와 계미화약(癸未和約)을 체결해 베트남을 식민지화했다. 베트남에서는 이를 계미년에 조약이 체결됐다고 해서 계미화약(Hòa ước Quý Mùi)이라 부르지만, 프랑스에서는 조약을 체결한 지역명을 살려 후에조약(Traité de Hué) 혹은 조약을 주도한 인물인 아르망 치안청장의 이름을 따 아르망조약이라 부른다. 아르망조약은 대한제국이 일제와 체결한 을사조약에 비견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때부터는 공식문건에 프랑스 국기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기를 사용했다.
③ 베트남제국 (1945년 3~8월)
이후 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과 2차 세계대전(1939년~1945년)이 펼쳐진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휘말렸던 프랑스는 식민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에게 본토마저 뺏겨버렸기 때문에 더욱 정신이 없었다. 이틈을 노려 일본제국(=일제)이 베트남에 들어왔고, 보호국이라는 명목 하에 식민지화를 단행했다.
이때 세워진 괴뢰국이 바로 베트남제국이다. (일제가 만주지역에 세운 만주국과 비슷한 느낌이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치열하게 치러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처럼 대대적인 수탈이 펼쳐졌고, 이에 베트남 인구의 10% 이상이 굶주려 죽는 대기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일제를 상대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펼쳐졌는데, 이를 주도한 단체가 바로 호치민(胡志明)이 세운 비엣민(Việt Minh)이다.
④ 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6년 12월 ~ 1954년 8월)
천만다행으로 베트남제국은 수립된 그해에 바로 일제가 전격적으로 항복을 선언함에 따라 불과 반년여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이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한다. 호치민의 비엣민은 그 영향력을 베트남 북부지역부터 서서히 넓혀갔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프랑스는 자신의 식민지인 베트남을 잠시 일제에게 빼앗겼던 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를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 한다. (베트남이 속한 지역이 인도차이나 반도다.)
프랑스는 허울뿐이긴 하지만, 아직 실체가 남아있는 코친차이나를 통해 베트남 남부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 베트남국(1949~1955)을 설립했다. 반면 베트남 북부지역은 호치민(胡志明)을 중심으로 한 비엣민의 존재감이 상당했기 때문에, 1946년 11월 하노이 근교에 있는 항구도시에 함대를 보내 무력도발을 한다. 이에 비엣민의 군사조직은 땅굴작전으로 맞서 싸웠는데, 의외로 선전했다. 1954년 3월에는 마지막 남은 프랑스군 진지인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 요새를 점령하며, 사실상 전쟁에 승리하게 된다.
⑤ 제네바 회담 (1954년 4월)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 이후, 베트남 문제를 놓고 1954년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담이 열렸다.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나누고, 2년 뒤에 이를 다시 통합하는 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한다. 이에 비엣민은 북베트남(월맹)으로, 베트남국은 남베트남(월남)이 되어 국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한국의 사례와 거의 비슷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반대의 현상이 발생했다. 한국의 경우 북한의 편이었던 소련이 통합선거를 반대했던 반면, 베트남은 남베트남의 편이었던 미국이 통합선거를 반대했다.)
⑥ 남베트남 (1949~1975)
남베트남은 공식적으로 베트남국을 뒤이어 1949년에 건국됐다. 프랑스가 철수한 자리에는 미국이 들어왔고, 독립운동가인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이 남베트남의 초대 총통으로 선출된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차지하게 된 응오딘지엠은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Bảo Đại) 황제를 축출하고 일부 부패한 군벌세력을 제거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기본적으로 무능했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부패했다.
참고로 베트남 북부지역은 호치민의 비엣민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이 자리 잡았다면, 남부지역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종교박해를 피해 피난 온 가톨릭 신자들,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들, 친프랑스로 분류되는 부유층들이 주로 모여있었다. 특히 기존의 토지를 지주들에게 무상으로 돌려주면서, 부유층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이로 인해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던 남베트남 농민들의 반발은 거세졌다.
⑦ 베트콩 등장
토지개혁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당시 남베트남에 산재해 있던 공산조직인 베트콩(Việt Cộng)이 득세하게 된 계기가 됐다. 공산조직이자 급진적인 무장조직인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우리에게 베트콩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베트콩은 스스로 남베트남의 토지개혁을 주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부패한 관리들과 지주들을 암살했으며, 더 나아가 남베트남의 국가주요시설들을 공격하는 등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전성기 시절의 베트콩은 남베트남의 농촌지역 절반 이상을 장악했을 정도로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이에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무너뜨려 적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키플레이어로 베트콩을 염두에 뒀을 정도였다. 실제로 지원도 많이 했다. 일명 호치민 루트로 불리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산길을 통해 막대한 군수물자와 함께 각종 공작이 가능한 간첩들을 보냈다. 참고로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당시 중립국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후 베트남 전쟁의 전면에 등장한 미국도 손대지 못했다.
⑧ 틱꽝득 스님 소신공양
또한 남베트남 정부는 불교계가 베트콩과 손을 잡았다고 판단해 이들을 탄압했다. 이에 베트남 불교계의 거두인 틱꽝득(Thích Quảng Ðức) 스님이 휘발유를 뒤집어쓰고 스스로 불을 붙여 소신공양을 올렸을 정도로 격렬한 종교저항이 시작됐다. 이때의 소신공양 사진과 영상이 일파만파 널리 알려져 남베트남 정부는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심지어 당시의 상황을 찍은 사진이 퓰리처상을 받았을 정도로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결국 1963년 10월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 내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을 제거했지만, 이후에 권력을 잡은 사람들도 상황을 수습하진 못했다. 제네바 회담 이후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정세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 간의 치열한 체제경쟁이 있었다. 비록 실제 전쟁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 수위가 마치 전쟁과 같다해서 냉전(冷戰)이라 부른다.
⑨ 2차 인도차이나 전쟁 = 베트남 전쟁 (1955년 11월 1일 ~ 1975년 4월 30일)
따라서 이 시기 한국과 베트남은 이들 초강대국들의 갈등이 폭발했던 곳이라고 보면 된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미국은 남베트남을, 소련은 북베트남을 지원했으며, 그 갈등의 끝에는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있었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이다. 사실 베트남 전쟁은 단순히 천조국 미국이 동남아의 이름 없는 약소국 베트남에게 패배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 속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엄청나게 다양한 핸디캡이 적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미국이 남베트남(월남)에 지상군을 파병했던 것은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즉, 북베트남까지 정벌할 마음이 1도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1950~1953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통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진영이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보며 위기감을 느끼긴 했지만, 이를 수습하는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이 계속 득세하는 상황을 계속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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