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베트남 건국신화는 베트남 역사를 소개할 때 잠깐 언급하는 정도로만 다루고 넘어가려 했는데, 공부하다 보니 생각보다 의미 있는 부분들이 많아 아예 따로 준비해 봤다. 그리스 신화를 성인이 돼서 다시 읽어본 사람들은 느꼈겠지만, 그 내용이 생각보다 굉장히 외설적이고, 개방적이라 많이 놀라곤 한다. 베트남 건국신화 역시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 하나하나가 한국의 건국신화와 여러모로 닮아 있어, 비교하며 읽다 보면 더욱 재밌게 느껴질 수 있다. 어느 나라든 건국신화는 사실상 허구에 가깝기 때문에 과학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따지는 것보다는 사건들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베트남 건국신화 (락롱꿘, 어우꺼 신화)
베트남 건국신화는 놀랍게도 중국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인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한다. 이 부분을 통해 베트남과 중국은 사실상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신농씨의 3대 후손인 데밍(Đế Minh)은 아들인 데응이(Đế Nghi)를 낳은 뒤, 남쪽으로 순방하던 중 부띠엔(Vụ Tiên)이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눠 배다른 아들인, 록뚝(Lộc Tục)을 얻는다. 이렇게 생긴 2명의 아들에게 권력을 나눠주었는데, 첫째 아들인 데응이는 북부지역(현재 중국)을, 남쪽에서 새로 얻은 아들인 록뚝은 남부지역(현재 베트남)을 각각 다스리게 했다.
록뚝은 이후 신화 속 베트남 최초의 국가라 할 수 있는 씩꾸이 왕국(Xích Quỷ)을 세우고, 턴롱(Thần Long)과 결혼하면서, 베트남 건국신화의 찐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락롱꿘(Lạc Long Quân)을 낳는다. 락롱꿘은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아 오랜 기간 나라를 잘 다스리다가 바다로 돌아갔다고 한다. 사실, 락롱꿘이라는 이름의 뜻은 락(洛 / 물이름 락), 롱(龍 / 용 용), 권(軍 / 군사 군)으로서, 바다의 신 혹은 남방의 해양문화를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 데응이의 아들인 데라이(Đế Lai)가 남부지역으로 쳐들어왔다. 데응이와 룩뚝은 비록 어머니가 다르긴 하지만, 아버지가 같은 이복형제이므로, 그들의 아들인 데라이와 락롱꿘은 사촌관계라 할 수 있다. 사촌인 데라이가 자신의 나라를 쳐들어온 관계로 이를 수습해야 되는 락롱꿘은 데라이의 아내이자, 오늘 주제의 또 다른 주인공인 어우꺼(Âu Cơ)를 산으로 유인한 뒤, 사랑을 저지르고 만다.
아내의 배신에 화가 난 데라이는 북쪽으로 돌아가고, 이후 락롱꿘과 결혼한 어우꺼는 붉은 막으로 덮인 한개의 큰 덩어리를 낳게 된다. 이를 불길하게 여겨 들판에 버렸는데, 며칠 뒤 이 덩어리에서 100개의 알이 나왔고, 이 알들에서 100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나중에 다시 한번 설명하겠지만, 이들은 훗날 백월(白越)족을 이루게 되며, 설화만 보면 고구려 주몽의 난생설화(卵生說話)와 굉장히 유사한 면을 갖추고 있다. 알은 사실상 각각의 민족들을 상징하고 있기에, 베트남은 이미 이때부터 다민족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갖추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하루는 락롱꿘이 어우꺼에게 '나는 물의 종족이고, 당신은 산의 종족이므로, 서로 다른 물과 불이 함께 사는 것은 어렵다.'며 이혼을 한다. 여기서 어우꺼는 산의 종족, 즉, 산의 신 혹은 북방의 대륙문화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락롱꿘은 50명의 아들과 바다로 돌아가고, 어우꺼는 나머지 50명의 아들과 산으로 돌아간다. 어우꺼가 데려간 50명의 아들 중 가장 힘이 강한 아들이 흥브엉(Hùng Vương / 雄王/ 흥왕)이 되어, 실질적인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왕국(Văn Lang)을 세우면서, 역시 베트남 최초의 왕조라 할 수 있는 홍방왕조(BC 2879~BC 258)의 기틀을 열게 된다.
여기서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점이 있다면, 중국의 요(堯)임금이 즉위한 시기가 BC 2356, 한국의 단군신화가 시작된 시기가 BC 2333라는 것이다. 한국의 건국신화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중국의 건국신화보다는 (차마) 오래됐다고는 하지 않았다. 반면에 베트남은 반랑왕국의 홍방왕조 설립시기를 BC 2879라고 주장하면서, 그네들 역시 중국만큼이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반랑왕국이 신화와는 다르게 BC 700부터 BC 258까지 실존했을 거라 예상한다.
흥브엉은 한국의 단군왕검과 같은 존재로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0일을 우리나라의 개천절에 해당하는 베트남 공식 국경일인 흥왕기일(Giỗ Tổ Hùng Vương / Hung King's Commemorations)로 지정해 그 의미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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